민족의식 일깨우던 종, 지리산문화관서 공개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살고 있던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사립 호양(壺陽)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으기 위한 취지를 이렇게 알렸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을 때 매천과 제자들은 학교를 세우자고 호소했다.
갑오경장 이후 새로운 교육제도가 실시됐다. 신교육을 실시하는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등 각급 관립학교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대개 양반 출신 고관들의 자녀가 주로 다녔다. 관리양성에 주력했다. 교육열은 민간에서 더 크게 일어났다. 정치 운동을 하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직접 교육에 뛰어들었다. 이런 경향은 을사조약 이후 뚜렷했다. 학교들은 지식 전달의 장에 그치지 않는 민족운동의 근거지였다. 호양학교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설립됐다.
당시 전남 구례군에 속했던 방광면, 용강면, 고달면(고달면은 1914년 곡성군에 편입) 등 여러 면의 주민들이 돈을 모았다. 설립자금은 720원이었다. 그리하여, 1908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학교가 세워졌다.
최근 이 호양학교의 종(銅鐘)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구례교육지원청이 교육청 사무실에 보관해오던 동종을 기증, 지난 21일 화엄사 앞에 있는 지리산 역사문화관으로 옮겨 전시를 시작했다. 이 문화관은 지리산의 역사와 지리는 물론 매천 황현을 기리는 공간 등으로 조성돼 있다.
이 동종에는 태극기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나라가 무너져가고 있을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의식을 높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 학교는 교사 6명이 학생 100여 명에게 지리,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종소리는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20년 일제에 의해 광의공립보통학교로 변형되었다. 광의면 지천리에서 연파리로 옮겨 세워졌다. 당시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양케 했던 사립학교들을 공립화했다. 일제가 필요로 하는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을 하는 데 치중하였다. 민족교육에 대한 차단이었다.
이 동종은 방광초등학교가 설립되자 주민들이 학교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제적으로 보면 호양학교의 후신은 광의초등학교이다. 그러나, 구례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듬해 구례사람들은 매천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방광초등학교를 세웠다. 호양학교를 세웠던 그 정신을 잇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호양학교의 후신을 방광초등학교라고 여기고, 이 학교에 동종을 기증한 내력을 추정할 수 있겠다. 방광초교는 한옥으로 지어졌다. 역시 민족의식의 상징이다.
동종이 있던 방광초교는 지난 1999년 폐교되었다.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농촌지역의 학교들이 폐교되거나 통폐합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옥 교사는 청소년 수련원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학교가 문을 닫으며 동종은 구례교육지원청으로 옮겨졌다. 지난 2013~2017년에는 순천대가 잠시 보관해오다, 다시 구례교육지원청이 보관해왔다.
전남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나 자란 매천은 백운산을 넘어 구례 광의면 지천리로 와서 학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은 왕석보(王錫輔, 1816~1868)였다. 그의 아들 왕사각(王師覺, 1836~1895)으로부터도 배웠다. 왕사각은 훗날 황현의 아들까지 가르쳤다.
스승 왕석보는 애국지사 나철, 이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왕석보는 당대 문명이 높았다. 고려왕조의 성씨였던 개성 왕씨다. 왕석보의 7~6대조 왕득인과 왕의성은 정유재란 때 섬진강변 석주관전투를 주도하고 왜군과 싸우다 순절했다. 구례를 대표하는 가문이었다.
매천은 나라가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경술국치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910년 9월 7일 "무궁화 이 나라가 망했구나" "나라가 망한 날 에 한 사람도 국난을 보고 죽은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며 음독 자결했다. 매천은 189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 ‘매천야록’과 동학농민혁명의 발생과 경과를 기록한 ‘오하기문’을 저술했다. 당시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역사비판의식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 정신이 동종을 통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2020-01-25 03:05:2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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